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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한국 기이문학 시리즈 2. '학산한언(鶴山閑言)' - 조선 후기 수도 한양을 전율케 한 기괴한 소문들 "조선판 어번 레전드(Urban Legend)의 실체"

by 노예의꿈 2026. 4. 15.

학산한언 커버 사진
출처-교보문고

도성의 관찰자, 학산(鶴山) 신돈복과 그의 서늘한 기록 정신

 

학산 신돈복(愼敦復, 1692~1779)은 영조 시대를 관통하며 살았던 사대부 지식인이자, 당시 급격하게 팽창하던 수도 한양의 명암을 가장 근거리에서 관찰한 인물입니다. 그는 명문 거창 신 씨 집안의 후예였으나,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권력의 핵심보다는 시정의 목소리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그가 남긴 '학산한언(鶴山閑言)'은 제목의 '한가로운 말(閑言)'이라는 겸손한 표현과는 달리, 당시 도성 안팎을 떠돌던 기괴한 소문과 실제 사건들을 냉철하게 기록한 '도시의 엑스파일'입니다.

18세기 한양은 단순한 왕조의 수도를 넘어 인구 20만이 넘는 거대 상업 도시로 변모하고 있었습니다. 인구의 밀집은 필연적으로 '익명성'을 낳았고, 성씨와 족보를 알 수 없는 외지인들이 뒤섞이며 기존의 유교적 질서는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신돈복은 바로 이 지점, 즉 '질서의 균열'에서 발생하는 공포를 포착했습니다. 그는 길거리에서 만난 노인, 저잣거리의 상인, 궁궐의 궁녀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단순 채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발생한 구체적인 지명과 시간, 그리고 목격자의 증언을 꼼꼼히 기록하여 야담의 수준을 리얼리즘의 경지로 끌어올렸습니다.

 

'학산한언'에 투영된 도시적 공포의 메커니즘

 

'학산한언'은 조선 후기 야담 문학 중에서도 '공간성'과 '익명성'을 가장 정교하게 다룬 작품입니다. 이전의 기이 문학들이 주로 산천이나 고립된 마을의 전설에 기반했다면, 신돈복의 무대는 철저하게 한양의 '골목'과 '저잣거리'입니다.

구체적 지명의 공포: 신돈복은 종로의 시전 거리, 남산의 음침한 골목, 동대문 밖의 황무지 등 한양의 랜드마크를 배경으로 삼습니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내가 오늘 낮에 지나온 그곳에서 밤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즉각적이고 생생한 공포를 유발합니다. 공간의 구체성은 괴담을 실제 사건처럼 느끼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팩트 전달 방식입니다.

익명성의 괴물화: 한양으로 몰려든 외지인들은 서로를 알지 못합니다. 신돈복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선비가 나타나 사람을 홀리거나, 낯선 여인이 건넨 술을 마시고 패가망신하는 일화들을 통해 '모르는 타자'에 대한 근원적 공포를 서술합니다. 이는 현대 도시 괴담의 핵심 기제인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성적 관찰과 기록: 신돈복은 기괴한 현상을 서술하면서도 "세상 사람들이 이르기를...", "누구의 집에서 전하기를..."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여 정보의 출처를 밝힙니다. 이는 자신이 직접 본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함과 동시에, 도성 내에서 '정보'가 어떻게 유통되고 왜곡되는지를 관찰하는 지성인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의 기록에 등장하는 귀신들은 단순히 무서운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은 대개 억울하게 죽은 원혼이거나, 사회적 불평등 때문에 한을 품은 자들입니다. 신돈복은 귀신의 입을 빌려 당시 한양 사회의 부패와 부조리를 역설적으로 폭로합니다. 귀신보다 무서운 것은 그 귀신을 만든 '인간의 탐욕'이라는 사실을 신돈복은 서늘한 필체로 증명해 냅니다.

 

질서의 붕괴와 지식인의 위기감

 

보수주의적 가치관에서 '학산한언'을 재해석할 때, 우리는 이 작품이 단순한 유희를 위한 괴담집이 아니라, 붕괴해 가는 성리학적 공동체에 대한 지식인의 '비명'임을 읽어내야 합니다.

첫째, 유교적 가치 체계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입니다. 보수적 관점에서 사회는 삼강오륜이라는 도덕적 기둥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신돈복이 본 한양은 그 기둥이 썩어 문드러진 상태였습니다. 부모를 배신하고, 돈을 위해 이웃을 죽이며, 신분을 속여 사기를 치는 행태가 만연했습니다. '학산한언' 속의 괴담들은 이러한 도덕적 진공 상태에서 피어난 독버섯과 같습니다. 신돈복은 기괴한 이야기를 통해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이 과연 사람이 살 만한 곳인가"라는 근본적인 회의를 던지고 있습니다.

둘째, 검증되지 않은 정보(괴담)의 정치학입니다. 보수주의는 근거 없는 유언비어가 민심을 선동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합니다. 신돈복은 비록 그 소문들을 기록했지만, 그 이면에는 "팩트가 실종된 사회가 얼마나 쉽게 광기에 휩싸이는가"에 대한 우려가 깔려 있습니다. 한양이라는 거대 도시에서 소문은 통제 불능의 속도로 퍼져나갔고, 이는 곧 통치 체제의 불안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신돈복의 기록은 곧 '정보 관리'가 실패한 사회의 혼란을 보여주는 뼈아픈 데이터입니다.

셋째, 신분제 균열에 따른 불안감의 투영입니다. 신돈복이 기록한 괴담 중에는 천민이 양반을 비웃거나, 귀신이 되어 사대부를 징벌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이는 견고했던 신분 질서가 하층민의 경제적 성장과 의식 변화로 인해 흔들리고 있음을 상징합니다. 보수 지식인이었던 신돈복에게 이러한 변화는 그 자체로 '기이하고 공포스러운' 현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믿어온 세계가 무너지는 과정을 '괴담'이라는 형식을 빌려 박제한 것입니다.

담배피는 호랑이와 까치가 그려진 민화
출처-월간중앙

'학산한언'의 차별화되는 점

 

신돈복의 '학산한언'은 한국 야담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합니다. 특히 이전의 '어우야담'이나 동시대의 '천예록'과는 그 지향점이 확연히 다릅니다.

어우야담(유몽인) vs 학산한언(신돈복): 유몽인이 전국적인 기행과 전설, 그리고 역사적 인물의 일화에 치중했다면, 신돈복은 철저하게 '현장의 팩트'와 '도시적 공포'에 집중했습니다. 유몽인이 낭만적 리얼리즘이라면, 신돈복은 차가운 도시 리얼리즘입니다.

천예록(임방) vs 학산한언(신돈복): 임방이 선비들의 신비로운 체험을 통해 유교적 교훈을 강조하려 했다면, 신돈복은 교훈보다는 현상의 기이함과 그것이 주는 사회적 압박감 그 자체를 묘사하는 데 공력을 들였습니다. '학산한언'은 독자에게 가르침을 주기보다 '직시'하게 만듭니다.

서사 구조의 근대성: '학산한언'은 장소의 구체성과 인물의 익명성을 결합하여 현대의 도시 전설과 매우 흡사한 구조를 가집니다. 이는 18세기 한양이 이미 근대적 도시의 맹아를 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문학적 증거입니다.

 

18세기 한양의 사회 지표와 신돈복의 관점

 

신돈복이 '학산한언'을 집필하던 시기의 사회적 데이터를 통해 이 작품의 리얼리티를 분석합니다.

한양의 인구 팽창: 18세기 후반 한양의 인구는 공식 기록과 유동 인구를 합쳐 30만 명에 육박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급격한 인구 증가는 주거 불안, 위생 문제, 그리고 범죄율 상승을 초래했습니다. 신돈복이 기록한 '어둠 속의 살인'이나 '정체불명의 습격'은 단순한 괴담이 아니라 당시의 치안 부재를 반영한 팩트입니다.

시전 상업의 발달: 종로를 중심으로 한 독점 상업 체계는 빈부격차를 심화시켰습니다. '학산한언'에서 부유한 상인이 귀신의 장난으로 하룻밤 사이에 거지가 되는 서사는, 당시 민중들이 가졌던 부의 불평등에 대한 적개심과 공포를 대변합니다.

전염병과 역귀(疫鬼): 주기적으로 창궐하던 마진(홍역)과 두창은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신돈복은 병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알지 못했던 시대에, 이를 '역귀'의 방문으로 묘사하며 당시 한양인들이 가졌던 죽음에 대한 극심한 공포를 데이터화했습니다.

- 신돈복의 작가적 위치

신돈복은 영조의 탕평책 아래서도 소외되었던 노론 낙론 계열의 지식인으로 분류됩니다. 권력의 중심부에서 비껴 나 있었기에 오히려 시정의 변화를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학산한언'은 중심이 아닌 주변부에서 바라본 조선의 가장 솔직한 기록입니다.

18세기 한양의 모습을 기록한 그림
18세기 한양의 모습_출처-경향신문

신돈복이 남긴 차가운 경고와 묵시록

 

신돈복의 '학산한언'은 우리에게 '도시라는 공간이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파괴하는가'를 보여주는 묵시록과 같습니다. 그가 묘사한 18세기의 공포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느끼는 고립감, 불신, 그리고 이유 없는 불안과 그 궤를 같이합니다.

보수적 관점에서 우리는 이 책을 미신적 공포를 즐기는 가십거리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공동체의 도덕적 기틀이 무너졌을 때 인간이 얼마나 비천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빈자리를 얼마나 기괴한 광기가 채우게 되는지를 연구하는 사회학적 텍스트로 읽어야 합니다. 신돈복은 자신의 붓으로 18세기 한양의 썩은 환부를 도려내어 우리 앞에 내놓았습니다.

팩트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이 분석이, 독자들이 '학산한언'을 통해 조선 후기 도시 문학의 정수를 발견하고, 그 속에 담긴 민초들의 절규와 시대적 아픔을 직시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공포는 눈에 보이는 귀신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도시의 냉소 그 자체입니다. 신돈복은 그 냉소를 경계하라고 우리에게 이 서늘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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